본문 바로가기

명소소개

대마도여행의 소소한 이야기들

쓰시마는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섬 전체가 쓰시마시(市)에 속한다. 시 아래 6개읍(이즈하라[嚴原町], 미쯔시마[美津島町], 도요타마[豊玉町], 미네[峰町], 가미아가타[上縣町], 가미쯔시마[上對馬町])이 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시청이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경작을 했다. 특히 대마도에는 멧돼지가 많아 에도시대에 멧돼지 퇴치를 담당하는 번사(藩使)를 두기도 하였다. 산촌에서는 숯제조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업이었기 때문에 산림의 벌채가 심했으나 이후 조림이 이루어졌다. 바다장어·오징어·도미잡이와 전복·소라·성게·천연김 채취를 하고,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이즈하라 항은 대마도의 주요 어항으로 오래전부터 번성하였으며 식당, 술집 등 번화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어획고가 줄면서 상업적인 활기도 줄어들었다. 매년 8월에는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한 아리랑 축제가 열린다. 부산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열도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골군 일본 본토 정벌을 위해 대마도에 상륙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마도를 근거지로 조선의 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폐해가 막심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였고 굶주린 왜구들에게 쌀을 제공하는 회유책과 벼슬을 하사하는 귀화정책 등의 정책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되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李從茂)가 200척의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대마도의 수비가 완강했고 복잡한 지형의 현지사정에 어두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마도의 지명은 고려와 조선의 영향을 받은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이 그 예가 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쓰시마도주(島主)는 소 요시토시(宗義智)였으며 그의 장인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선발대로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이후 대마도 번주 소우지[宗氏]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이 활발했다. 1906년 구한말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곳이며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두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개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쓰시마의 중심지역인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소 요시토시를 기리는 반쇼인(萬松院)등이 남아 있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가기 때문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이 남아있으며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가 있다. 또한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부근에 대마도 민속자료관과 향토사료관이 있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 이예(李藝)의 공적비가 대마도 미네초(峰町)에 소재한 엔추지(圓通寺)라는 사찰에 세워졌다. 그리고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新羅國使朴堤上公殉國碑)가 있다. 그는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되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 등 113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출처:백과사전

대마도를 여행을 시작하지전에 대마도의 유래를 알아보기로 하자.
대마 두개의 말이 마주보고 있다하여 대마라 하였다한다.
1일차: 미우라해수욕장》점심》한국전망대》온천
만제교》이즈하라 숙소》나카라이 토스이》하치만구신사(팔번궁)
하타하츠항에 내려 100대 해변에 들어간다는 미우라해수욕장을 갔다.

 에메랄드 빛 해변이 조용하고 깨끗했다. 자연그대로 보존하려는 일본사람들을 마음을 알수있었다.
한국전망대로 가기전에 간단한 식사를 하기 위해서 보잘것 없는 창고같은 집으로 갔다

또 놀란건 안은 깨끗하고 종업들이 친절하다는
사실이다. 일본사람들은 보여주기식 전시를 안한다는 사실이다.
식사도 정갈하게 나왔고 모자란듯 배부른듯
알다가도 모르는 나의 배를 위로 하면서 한국전망대를 올랐다.

한국전망대는 대마도의 최북단에 있는 전망대로서 부산에서 불과 49.5km 거리에 있는 곳으로 맑은 날에는 부산 거제도을 볼수 있는 곳이고 설계단계에서 부터 한국건축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서울의 파고다 공원의 정자를 모델로 삼아 팔각정으로 지은 건물이고 한국산 재료로 지어진  전망대라고 한다.

온천에 갔는데 거기서도 조용하고 깨끗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수건과 비누를 비치하지 않는다.수건 100엔에 빌려 온천탕으로 들어갔다
온천안도 깔끔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삼푸와 바디워시가 있어 다행이었다.

만제키바시 ( 만관교)
일제가 1905년 러ㆍ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개설해 놓은 만제키세토 운하 위 다리
만관교에 도착했다.대마도는 이 다리를 중심으로
북부와 남부가 나뉜다.
전쟁중에  일본은 러시아를 여기로 끌려들어 인공으로 만든 운하에서 임진왜란에 우리 수군이
쓰던 학위진으로 대성하여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에 들어간다.
그래서 역사란 아이러니 한것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이즈하라에 있는 우리나라 마지막 수신사들 에도막부의 거절로 대마도에서
회담한장소인 나카라이 토스이 집을 찾았다.

나카라이 토스이는
대마도출신의 기자이자 소설가로 우리나라 소설 춘향전을 일본에 소개한 사람이다.
나카라이 집안은 대대로 대마도 번주의 주치의 가문으로 부산의 왜관에서 의사로 상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소년기를 부산에서 보내면서 한국어를 배우게 된다
 춘향전을 20회로 번역하여 연재하였는데 소설의 줄거리뿐만 아니라 주석도 달았다고 한다.
사실,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건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이자 연모의 대상이였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카라이를 이야기하면서 빠뜨릴 수가 없는 것이 2004년도에 발행된 일본 5000엔 지폐의 주인공인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
메이지 시대 최초의 여류소설가로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져있다.
20살의 히구치는 소설가를 지망하여, 나카라이 (당시 32세)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온다.
근대 소설의 여명기에 여성이라는 제약을 갖고 있으면서도 작가로서 자립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사랑, 돈, 건강을 모두 잃고 폐결핵으로 25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녀의 사후 남겨진 일기를 통해 나카라이 도스이를 향한 연모의 정이 알려지게 되었다.
참조:백과사전

이즈하라시내 중심가에 있는 하치만구 신사를 갔다. 하치만구 신사는 장군이나 무사들을 모신신사라 한다.

하치만구(팔번궁) 입구 개 형상 좌 암개 우 숫개 숫개는 입을 벌리고 있다.

점을 보는 곳인데 점쾌를 보고 길흉일때 밑에 보이는 있곳에다 소원을 비는 문구를 적어 놓고
간다고 한다.우리나라 절에 있는 검은기와에 글을
쓰고 비는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하치만구(팔번궁) 신사 입구가 나오고 바로 정면으로는 본당이 자리하고 있다.본당 앞에는 청마상이 서 있었으며  본당 옆에는 또하나의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신사 답게 엄청난 크기의 고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가네이시 성터로 쓰시마 시청지나 왔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옹주 결혼봉축비가 있는 성터이 곳은 덕혜옹주의 파란만장한 삶과 역사가 담겨져 있는 곳이다.

덕혜옹주의 결혼 봉축비는 덕혜옹주가 결혼한 뒤 대마도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이 돈을 모아서 세운 비라고 한다.

대마도 대주 백작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한 덕혜옹주는 1년후에 딸을 낳지만 정신병을
얻게된다. 그후 딸도 정신적인 병을 얻어 유서를
쓰고 실종되자 덕혜옹주는 병은 더 깊은진다
그녀의 남편마져 그녀를 버린다.
이승만은 그녀에게 부담느껴 고국의 귀향을 꺼렸어나 박정희때 귀향하여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조선도 마지막공주도 그렇게 꺼져갔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이 하는 매장처럼 쇼팽 먹걸이
100엔 상점 약국등이 있는 대형상점이다.

멧돼지구이와 생선회로 배를 채우고 마당히 뒷풀이 할 장소가 없어 객실 하나를 즉석 투다리로 만들어 늦은 밤까지 까르르~~~ㅎ
2일차 :에보시다케 전망대》》와타즈미신사》》점심》》비틀승선

아침을 간소하게 먹고 에보시다케 전망대를
향했다.
대마도의 조망일번지 "에보시다케 전망대" 에서는 육지의 침강에 의해 만들어진 아소만의 무수한 섬들과 몇겹의 산들이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풍경들을 360도 로 볼수 있는 곳이다.

에보시다케전망대 바로밑에 위치한 와타즈미신사에 갔다
 와타즈미 신사 는 바다의 신을 모신 해궁 으로,용궁전설이 남아있는 곳이고 본전 정면의 바다위에 서 있는 5개의 토리이 가 조수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는 곳이다.

토리이 (鳥居)이란
일본의 모든 신사며 신궁의 입구에 세운 기둥문이다.
신사의 경내에 들어서기 전에 세워져 있는 두개의 기둥과 두개의 가로대 나무로 만든것 으로
요즘은 콘크리트로 만들기도 한다.
새 조 (鳥) 자에 살거 (居) 로 나타내는 토리이는 글자 그대로 새가 사는곳이라는 뜻인데
하늘이 신의 말씀을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전해주는 새는 성스러운신당터네 세운 드높은 장대의 꼭대기에 앉아있다고 생각해서 라고 한다.
출처:백과사전

히타카츠항에서 면세점에서 쇼핑을 마치고
점심먹고 비틀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국민들은 그다지 욕심이 없는것처럼 보였다.자연속에서 자연의 순리를
따라 못나지도 그렇다고 남에게 폐를 끼지지않은
지극히 개인주의면서 협력하고 친절한 민족임을
느꼈다.차분하고도 조용한나라 그자체만으로도
힐링이 아닐수 없었다.

일본에서  한때 유행한 노래 고요비토요, 마유미이츠가 노래한 곡을 부르면서 대마도
여행을 여운으로 달래본다.
http://youtu.be/AdNs_ywgq7g

http://https://youtu.be/AdNs_ywgq7g

http://자연풍경펜션글램핑.kr




 

'명소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주산 용지봉을 오르다  (0) 2018.11.28
고창 선운사 상사화  (2) 2018.09.10
당사 해양 낚시공원  (0) 2018.04.22
김천 직지사를 찾아서  (0) 2018.04.05
아쿠아플라넷제주에 가다.  (0) 2018.01.23